로마인 이야기 1 - 제1장 로마의 탄생, 유민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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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민족이든 전승이나 전설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뿌리를 확실히 하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소망일 것이다. 과학적으로 해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은 일이지만, 사람들은 과학적인 해명 따위는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의 논리성과 그들의 정신을 고양시키기에 충분한 이야기가 있으면 된다. 로마인에게 그것은 트로이 함락과 관련된 하나의 에피소드였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계문학사상 최고 걸작의 하나로 손꼽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따르면, 소아시아 서안의 풍요로운 도시 트로이는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그리스군의 공격을 받아 10년 동안이나 계속된 공방전도 드디어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해변에 서있는 거대한 목마를 발견한 트로이 사람들은 그 목마를 그리스군이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남긴 선물로 오해하고, 10년 동안이나 지켜온 트로이 성 안으로 목마를 끌어들이고 만 것이다. 승리를 눈앞에 두었다고 생각한 트로이 병사들이 깊이 잠든 밤, 목마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이 한 사람씩 땅으로 내려왔다. 


화염과 아비규환에 휩싸인 트로이는 그날 밤에 함락되고 말았다. 왕족도 서민도 가차없이 살해되고, 목숨을 건진 자는 노예가 되었다. 이같은 참극 속에서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사위인 아이네이아스만이 일족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한다.

 

아이네이아스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인간 남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데, 아프로디테는 자기 아들이 그리스 병사의 손에 죽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아이네스아스 일행은 몇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불타는 트로이에서 탈출했다.

 

이들의 편력은 그리스의 여러 섬에서도 카르타고에서도 끝나지 않고, 신들이 이끄는 대로 이탈리아 서해안을 북상하여, 로마 근처의 해안에 이르러서야 겨우 끝난다. 그 땅의 왕이 아이네이아스에게 반하여 딸을 아내로 주었기 때문이다. 조국을 떠나 떠돌던 유민들은 드디어 정착할 땅을 가지게 되었다.  

 

아이네이아스가 죽은 뒤에는 그와 함께 트로이에서 탈출한 아들 아스카니오스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아스카니오스는 3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뒤, 그 땅을 떠나 알바롱가라고 이름지은 새 도시를 건설한다. 이것이 뒷날 로마의 모체가 된 도시였다. 


이때부터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할 때까지 오랫동안 많은 건설적인 왕들이 잇따라 등장하지만, 그 사연을 일일이 기술하는 곳은 그만두기로 하겠다. 낯선 이름을 나열하여 독자를 따분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인이 억지로 꾸며낸 대목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로마인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국한 것은 로물루스이고, 그 로물루스는 트로이에서 도망쳐 나온 아이네이아스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리스와 교류를 갖기 시작한 뒤, 로마인은 트로이 함락이 기원전 13세기 무렵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로마인은 400여 년의 공백을 메울 필요에 쫓겼지만, 그래도 별로 난감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전승과 전설의 세계에서는 합리적인 것보다 오히려 황당무계한 것이 더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전설은 그 공백기를 적당히 소화한 다음, 한 왕녀의 등장을 맞이했다. 

 

알바롱가의 왕이 죽자, 동생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조카인 왕녀를 처녀인 채 신을 섬기는 무녀로 만들어 버렸다. 왕녀가 아들을 낳으면, 왕위를 찬탈한 숙부가 난처한 입장에 몰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을 섬기는 틈에 잠깐 강가에서 잠이 든 왕녀한테 군신 마르스가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마르스는 하늘에서 내려와 왕녀와 사랑을 나눈다. 왕녀가 잠에서 깨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니까, 이런 것을 두고 신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는데, 왕녀는 그 쌍둥이에게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숙부는 격분했다. 왕녀는 감옥에 갇히고, 쌍둥이는 바구니에 담긴 채 테베레 강에 띄어졌다. 갓난아기가 든 바구니는 테베레 강 어귀까지 떠내려가, 강가의 갈대숲에 걸려 멈추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늑대가 안에서 나는 젖먹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두 아기에게 젖을 물려 굶주림에서 구해준 것은 바로 이 어미 늑대였다. 

 

물론 그 후에도 줄곧 젖을 먹고 자랐다면 곤란하게 되었겠지만, 늑대 다음에는 양치기가 쌍둥이를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가서 길렀다. 지금도 로마 시내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으로 가는 길에는 양떼를 자주 볼 수 있지만, 2천 800년 전에는 양떼가 그 지역의 주인공이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는 성장하여 그 일대 양치기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들과의 투쟁을 거듭하면서 차츰 세력권을 넓혀간 것이다. 세력권이 넓어지면 새로운 정보도 들어오게 마련, 이리하여 형제는 자신들의 출생에 얽힌 비밀도 알게 되었다. 형제는 부하들을 이끌고 알바롱가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싸움에 이겨서 왕을 죽였다. 어머니는 이미 옥중에서 죽은 뒤였다. 그러나 형제는 알바롱가에 머물지 않았다. 산지에 있는 알바롱가는 비좁고, 방어하기에는 적합하지만 발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두 사람이 자란 곳은 테베레 강 하류였다. 

 

곧  로마라고 불리게 된 그 땅에 두 사람은 도시를 세우기로 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알바롱가의 왕을 처단한 뒤에는, 그때까지의 부하들 외에 부근의 양치기와 농민들까지 이들 형제를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공동의 적을 무너뜨린  뒤, 형제 사이가 나빠졌다. 

 

쌍둥이였기 때문에 누가 왕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웠고, 이런 난점이 둘 사이가 나빠진 원인이었다. 형제는 분할 통치를 하기로 하고,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에,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에 각각 세력기반을 두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싸움은 곧 재발한다. 

 

세력권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로물루스가 판 도랑을 레무스가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의 권리에 대한 침해 행위였고, 로마인이 생각하기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였다. 건설자 오물루스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지어졌다는 로마는 이렇게 탄생했다. 

 

때는 기원전 753년 4월, 그리스에서는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피아 경기도 어느덧 6회를 지나, 신화와 전설의 세계를 벗어난 역사시대에 들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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