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 - 제1장 로마의 탄생, 이탈리아의 그리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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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세기의 그리스는 귀족이 통치하는 도시국가(폴리스) 시대에 접어들어 있었다. 농업과 목축업을 주로 하던 왕정 시대에 비해 공업과 상업 및 해운업에까지 손을 뻗친 덕분에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했고, 그에 따라 인구도 급속히 늘어났다. 

 

하지만 귀족정치의 숙명인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사람과 경제발전 과정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싸움도 계속 증가했다. 경작지가 별로 없는 그리스에서 이런 사람들은 국외로 나가는 것밖에는 살아갈 길이 없었다. 기원전 8세기는 그리스인의 식민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다. 

 

그들의 특징인 진취적 정신과 모험을 좋아하는 성향이 여기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스인의 식민지 건설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 골고루 미쳤다. 동쪽으로는 흑해 연안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프랑스에서 에스파냐에 이르렀다. 에스파냐의 말라가와 프랑스의 마르세유도 이 시기에 세워진 그리스 식민도시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그리스와 가깝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식민도시 건설은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왕성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남부 이탈리아 도시들의 기원은 몇몇 카르타고계 도시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그리스계가 차지하고 있다. 나폴리, 타란토, 유적으로만 남아 있는 페스툼과  쿠마이, 시칠리아 섬의 메시나, 시라쿠사, 아그리젠토 등등. 이런 도시들을 통틀어 '대 그리스'(마그나 그라이키아)라고 불렀다.
  

'대 그리스'라고 부른 이유는 이런 도시들이 급속히 발전하여 단기간에 풍요로운 번영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이미 높은 문명을 가진 그리스인이 정착했으니까, 모든 면에서 시행착오가 없다. 또한 원주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원주민과의 관계로 고심할 필요도 없었다. 조국을 버리고 왔기 때문에, 여기서 실패하면 돌아갈 곳도 없다. 

 

급속한 번영의 요인은 지나칠 만큼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이런 식민도시와 모국의 관계도 독립심이 왕성한 그리스인의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 타란토 사람들에게 스파르타는 타국이었고, 시라쿠사 사람들에게 코린트는 타국이었다. 그래도 교류는 활발했다. 


그리스인은 육지를 가는 것보다 훨씬 가벼운 기분으로 배에 돛을 다는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부 이탈리아오 이주한 그리스인은 또 한 가지 점에서도 역시 그리스인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지만, 단결심과는 인연이 멀었다. '대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도 서로 힘을 합하여  공동으로 싸운 적은 한번도 없었다.
  

갓 태어난 로마가 북부의 에트루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라는 양대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이 로마의 독립을 존중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로마에는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이 자기네 세력권 안에 넣고 싶어할 만한 매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물건을 팔러 다니는 상인은 물건을 사주지도 않고 팔 물건을 만들지도 못하는 사람한테는 처음부터 가까이 가지도 않는다.농업과 목축밖에 모르는 로마인은 아테네의 장인이 만든 아름다운 항아리를 살 돈도 없었고, 에트루리아에서 만든 정교한 금속기구를 살 돈도 갖고 있지 않았다. 요컨대 로마인은 상인에게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바다와 가깝지도 않고 방어에도 적합하지 않은 로마는 그리스인이나 에트루리아인이 뿌리를 내리고 싶어할 매력도 없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에트루리아인은 해로를 택하지 않으면 육로로 남하할 수밖에 없었지만, 로마 근처에 와도 테베레 강에 떠 있는 작은 섬을 지나 강을 건너서 그리스인이 있는 남쪽으로 갈 뿐이었다. 

 

말하자면 로마는 강을 건너기 쉬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 통과점에 불과했다. 통과점이라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말없이 보내주기만 하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로마는 유년기에 강대한 적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바다를 겁내지 않는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을 이어 주는 간선통상로는 그 당시에는 역시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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