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맞은 시기에 인재가 알맞은 자리에 등용되어 능력을 발휘하는 예는 융성기에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로마 역사도 상당히 오랫동안 이런 예를 보여주지만, 누마의 즉위도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마는 로물루스의 초빙을 받고 로마로 이주한 동포들과는 달리,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 남은 사비니족이었다.
농사를 짓는 한편, 지식 탐구에도 힘쓰는 주경야독의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높은 덕망과 깊은 교양은 로마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라틴파와 사비니파의 대립으로 경직 상태에 빠진 로마 원로원은 누마를 만장일치로 왕으로 추대했다. 사비니족의 땅까지 누마를 찾아간 장로들은 이 사실을 그에게 전하고, 왕위에 앉아 달라고 부탁했다.
누마는 처음 얼마 동안은 거절했다. 그는 이미 나이 마흔 살이 되어 있었다. 그 시기의 마흔 살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삼고초려의 요청을 받은 누마는 결국 장로들의 뜻을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로마로 갔다. 로마에 들어간 누마는 헐렁하고 긴 겉옷(토가) 끝으로 도끼자루에 한 묶음의 막대기를 묶은 왕의 권표를 받쳐들고 그 뒤를 따르지도 않았다.
민회의 찬성을 얻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누마는 신권정치를 할 생각은 없었다. 로마의 왕은 왕이 곧 신인 이집트의 파라오와는 다르다. 신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신관적 색채가 짙은 메소포타미아의 왕과도 다르다. 또한 부유하고 유력한 일족의 우두머리라는 느낌이 강한 그리스의 왕과도 달랐다.
로마의 왕은 신의 뜻을 나타내는 존재가 아니다. 공동체의 뜻을 구현하고, 그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존재다. 죽을 때까지 왕위에 앉기는 하지만, 왕위를 세습하지도 않는다. 또한 선거를 통해 뽑힌다. 로물루스한테도 아들이 있었지만, 그 아들이 후계자가 된다는 것은 당시 로마에서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었다. 로마의 왕은 군주라기보다는 오히려 종신 대통령에 가까웠다.
역사가 이비우스는 (로마사)에서 누마의 업적을 소개할 때,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왕위에 오른 누마는 법과 픙습을 개선하여, 그때까지 폭력과 전쟁으로 기초를 쌓은 로마에 건전함을 주고자 했다." 여기서 법이란 법률 제정이라기보다는 질서 확립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우락부락한 성격이 강한 당시의 로마인에게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가르치고, 자기 힘의 한계를 아는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는 전재에 대한 경외심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누마는 출입문의 수호신이며 전쟁의 신이기도 한 야누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었다.
야누스 신은 입구와 출구라는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반대방향을 향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모습으로 표현된다. 누마는 완성된 야누스 신전의 앞문과 뒷문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이 문은 전시에는 열리고 평화시에는 닫힌다고 말했다. 누마가 로마를 다스린 43년 동안, 이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덧붙여 말하면, 이 문은 누마가 죽은 뒤에는 줄곧 열린 채로 세월이 흘렀다. 기원전 240년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잠시 닫혔지만 곧 다시 열렸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은 뒤에 시작된 내란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무찌른 기원전 31년에야 세 번째로 닫혔다고 한다.
누마는 이 시기를 로마에는 방어를 위한 전투말고는 어떤 싸움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으레 따라 다니는 것이었지만, 구태여 약탈을 하지 않아도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누마는 로마 시민들을 각종 직능별로 분류하고, 모든 시민이 독자적인 수호신을 갖는 단체에 소속되도록 했다.
목수조합, 철공조합, 염색공조합, 도공조합 등이 있었다. 직능별 단체를 결성한 것은 백성들에게 직업에 대한 긍지를 갖게 하려는 목적보다는 라틴족과 사비니족의 부족간 대립을 막으려는 목적이 더 강했다. 로마에는 이 두 부족 외에도 여러 민족이 유입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트루리아인 공동체까지 결성되어 있었다.
건국 당시부터 로마는 다민족 국가였다. 이런 종류의 국가에서 일어나기 쉬운 마찰을 미리 막지 않고는 국가로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누마는 백성들의 일상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달력도 개혁했다. 로물루스 시절의 로마에서는 1년의 날수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누마는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1년을 12달로 정하고, 일년의 날수를 355일로 결정했다. 남는 날수는 20년마다 결산한다. 누마가 정한 이 달력은 율리시스 카이사르가 1년을 365일로 개정할 때까지 650년 동안 로마인의 일상을 관장하게 된다.
또한 1년 동안 각 달의 배치도 3월이 첫달이었던 것을 세번째 달로 바꾸고, 11월과 12월이었던 달을 앞으로 가져와서 각각 1월과 2월로 하기로 했다. 하지만 각 달의 명칭까지는 바꾸지 않았다. 사람들이 익숙해진 것까지 바꿈으로써 생기는 혼란을 피하게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9월 이후의 명칭이 본래의 의미와 어긋나게 되었다. 다음의 표는 각 달의 명칭인데, 우리말과 라틴어와 영어 순서로 되어 있다. 라틴어에서 직접 파생되지 않은 영어를 든 이유는 그 영어 역시 로마 문명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누마는 1년 동안의 축제일과 휴일도 정비했다. 매달 아홉번째 날과 열다섯번째 날에는 장이 선다. 밭일에서 해방되어 저마다 수확물을 가지고 모이는 이 날이 로마인의 휴일이었다. 그밖에 저마다 수확물을 가지고 모이는 이 날이 로마인의 휴일이었다. 그밖에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축제일이 있다. 축제일은 1년에 45일을 헤아렸다고 한다. 나라에서 공식으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 축제일에는 모든 공무를 쉬었다.
제2대 왕 누마의 업적 가운데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종교에 관한 개혁일 것이다. 누마가 통치하기 전에도 로마인은 이미 많은 신을 섬기고 있었다. 누마는 그런 신들을 정리했다.
나중에는 그리스 신들과 혼동하게 되었지만, 신들의 왕인 유피테르 신(그리스에서는 제우스, 영어로는 주피터), 그의 아내인 유노 여신(그리스에서는 헤라, 영어로는 주노), 미와 사랑을 관장하는 베누스 여신(그리스에서는 아프로디테, 영어로는 비너스), 수렵의 여신 디아나(그리스에서는 아르테미스, 영어로는 다이애나), 그리고 학문과 예술의 신 아폴로와 지혜의 여신 아테네, 전쟁의 신 마르스도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도 중요한 신이었다.
그밖에 야누스 신을 비롯하여 예로부터 내려온 라틴족의 고유한 신들도 있다. 선왕 로물루스도 죽은 뒤에 신격화되어 신이 되었다. 누마는 이런 신들을 정리하여 계급을 부여했다. 하지만 어떤 신 하나를 정하여, 이것이야말로 로마의 신이라고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신들을 공경하는 일의 중요함을 가르쳤다.
그리스와 로마로 대표되는 다신교와 유대교 및 기독교를 전형으로 하는 일신교의 차이는 다음 한 가지뿐이라고 생각한다. 다신교에서는 인간의 행위나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신에게 요구하지 않는 반면, 일신교에서는 그것이 바로 신의 전매특허다.
그리스 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다신교의 신들은 인간과 똑같은 결점을 지니고 있다. 윤리 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맡지 않기 때문에, 결점을 지니고 있어도 전혀 지장이 없다. 하지만 일신교의 신은 완전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버려두면 감당할 수 없게 바로잡는 것이 신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모세의 '십계명'은 다음과 같은 열 가지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1.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라.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3.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적질하지 말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
무엇에나 어디에나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네 왕이었던 사람까지 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로마인에게는 우선 첫 번째 계율부터 적합하지 않다. 또한 신망만이 아니라 선조의 조상을 새기는 것도 좋아한 로마인에게는 두 번째 계율도 인연이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 계율 역시 로마인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그들은 "아뿔사!" 하고 말하는 대신, 유피테르 신이나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부르는 버릇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번째 계율은 안식일에 관한 것인데, 로마인의 휴일은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말고는 아무일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평소에 늘 하는 일만 하지 않는 날이었다.
다섯 번째부터 열번까지의 계율은 로마인도 지키는 편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6개 항목은 윤리도덕에 속한다. 종교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짐승에 머무르느냐 아니면 인간답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시키지 않더라도 보통은 누구나 지키려고 애쓸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유대교에서 파생한 기독교에서는 모세의 십계명 가운데 첫 번째 계율만은 유대교에 충실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신교지만, 그밖의 계율은 모두 다신교 방식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상을 새기고, 신이나 주님의 이름도 '함부로' 부른다. "아뿔사!"하고 말하는 대신, "오, 나의 하나님!"이나 "예수님!" 하고 외친다. 안식일에도 스포츠 같은 것을 하면서 즐긴다. 그렇게 때문에 세계 종교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섯 번째부터 열번째까지의 계율에 나타나 있는 입장, 즉 인간의 행위나 생각을 바로잡는 것이 종교 분야에 속한다는 것은 기독교도 유대교와 전혀 다르지 않다.
타협의 명수였다는 것은 곧 인간 심리를 잘 통찰하는 명수였다는 뜻이지만, 그런 기독교도 어디까지나 일신교였다. 그런데 로마신은 신에게 자기네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요구하지 않은 대신 무엇을 요구했을까. 그것은 바로 수호신 역할이다. 수호를 요구한 것이다.
수도 로마를 지키는 것은 최고신 유피테르를 비롯한 신들이고, 싸움터에서는 군신 마르스나 야누스 신이 그들을 지켜주고, 농업은 케레스 여신이, 포도주 제조는 바쿠스 신이, 경제력 향상은 메르쿠리우스 신이, 병이 나면 아이스쿨라피우스 신이 지켜주고, 행복한 결혼과 여자를 지켜주는 것은 유노 여신이었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지만, 로마인은 이런 수많은 신들이 자기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로마에는 추상적 사고를 장기로 삼는 그리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신들이 살게 된다. 이것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로마인의 성향이 낳은 결과이기도 했다. 또한 로마인은 타민족의 신들도 배척하지 않았다. 배척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신은 수호신이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구석구석까지 관심을 가지고 잘 보살펴 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고대 로마의 수호신은 아무 일도 않고 빈둥거리는 사람까지 지켜주는 너그러운 신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옆에서 돕는 것이야말로 수호신이 마땅히 지녀야 할 모습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유쾌한 예가 바로 비리프라카 여신이다. 이 여신은 부부 싸움의 수호신으로 되어 있었다. 부부싸움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지만,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말다툼이 시작된다. 둘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장하는 목청도 점점 높아진다. 잠자코 있으면 진다고 생각하니까, 상대가 입을 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계속 떠들게 된다.
이렇게 되면 상대도 발끈해서 그만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나갈 뻔하지만, 꾹 참고 둘이서 비리프라카 여신을 모시는 사당에 간다. 거기서는 여신상이 있을 뿐, 신관도 없고 아무도 없다. 신전에서 사당에 이르기까지 신을 모시는 모든 성소에 신관을 배치하려면 로마 인구를 전부 다 동원해도 모자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여신의 사당에는 나름대로 규칙이 있었다. 신을 믿는 로마인은 감시자가 없어도 그 규칙을 지켰다. 비리프라카 여신 앞에서 지켜야 할 규칙은 한 번에 한 사람씩 차례로 여신에게 호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어느 한쪽이 여신에게 호소하는 동안 다른 한쪽은 잠자코 듣고 있을 수밖에 없다.
잠자코 듣고 있노라면 상대의 주장에도 일리가 없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양쪽이 되풀이하는 동안 흥분했던 목청도 조금씩 가라앉고, 결국에는 둘이서 사이좋게 사당을 나오게 될지도 모른다.
신에게 수호를 요구하는 그리스-로마적인 사고방식은 생각해보면 인간성에 적합한 자연스러운 욕구다. 유대교보다는 유연성이 풍부한 기독교, 특히 카톨릭 교회가 이 점에 주목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일신교다. 그래서 수호신의 역할은 성자들이 대신 맡게 되었다.
이것도 쓰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 어쨌든 오쟁이진 남편을 수호하는 성자까지 있었을 정도니까. 기독교에서는 '수호신'이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수호성신'이라고 불렀다. 덧붙여 말하면, 근대국가 이탈리아에도 수호성신이 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바로 이탈리아의 수호성신이다. 하지만 절충에 뛰어난 기독교도 부부싸움을 담당하는 수호성신까지는 배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누마는 로마인을 지키는 신들에게 봉사하는 신관 조직을 정비했다. 신관계급의 우두머리는 최고신관(폰티펙스 막시무스)이 맡는다. 그 밑에 5명 내지 10명의 대신관이 있다. 그밖에 성화를 지키는 무녀(베스타)들이 있었다. 이들은 30년 동안 무녀로 근속하는데, 그 동안 처녀성을 지켜야 했다.
그밖에 새가 나는 모습이나 모이를 쪼아먹는 방법을 보고 공사의 길흉을 점치는 10명 정도의 사제가 있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흉하다는 점괘가 나오면 군단이 철수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적인 로마인에게 그런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우선, 흉하다는 점괘가 나온 경우에도 그것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효력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제가 눈을 감으면 그만이다. 또한 길흉을 판단하는 것은 사제들의 임무였기 때문에, 그들이 점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길흉이 결정되는 실정이었다. 새가 군단 지휘관이 바라는 점괘를 내놓게 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요컨대 병사들이 길조라고 믿으면 그만이다. 윗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깨어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종교를 생각할 때 특히 주목해야 할 특징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로마에는 전임 신관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로마인은 세속의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 역할만 하는 사람을 따로 두지 않았다. 로마의 대신관과 사제들은 신의 가르침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다.
신을 대신하여 신의 존재를 지상에서 보여주는 사람도 아니다. 신관이나 사제가 되는 데에는 특별한 능력도 필요없고, 그 능력을 기르는 훈련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녀를 제외하면 보통 사람과 똑같은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최고신관부터 사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직자는 민회에서 선거로 결정되었다.
집정관을 비롯한 정부 관리와 아무 차이가 없다. 말하자면 국가 공무원이다. 신관에 대한 고마움은 줄어들지 모르지만, 이점도 적지 않았다. 고정된 계급이 아니니까, 다른 계급이나 관직에 대한 질투심이 생기지 않는다.
자기가 속해 있는 계급을 보전하기 위해 종교를 지나치게 존중하는 일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 이런 로마에서는 종교와 정치의 불화나 유착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정교 분리를 참으로 자연스럽게 정착시킨 것이야말로 누마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력 기원이 기원전에서 기원후로 바뀔 무렵에 살았던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니시오스는 '고대 로마사'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로마를 강대하게 한 요인은 종교에 관한 사고방식이었다." 로마인에게 종교는 지도원리가 아니라 버팀대에 불과했기 때문에 종교를 믿음으로써 인간성까지 속박당하는 일도 없었다.
강력한 지도원리를 갖는 것에는 이점도 있지만, 자기와 종교가 다른 남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광신적이 아니기 때문에 배타적이지도 않고 폐쇄적이지도 않은 로마인의 종교는 이교도나 이단이라는 개념과도 거리가 멀었다. 로마인은 전쟁을 하긴 했지만, 종교전쟁은 하지 않았다. 일신교와 다신교의 차이는 단순히 믿는 신의 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의 신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도 차이가 있다.
남의 신도 인정한다는 것은 곧 남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누마의 시대부터 2천 70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우리는 일신교적인 속박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의 윤리도덕이나 행위를 바로잡는 역할을 맡아주는 형태의 종교를 갖지 않을 경우, 짐승과 같은 상태에 바지고 싶지 않으면 개인이든 국가라는 공동체든 간에 자기정화 체제를 가져야 한다.
로마인에게 그것은 가부장의 권한이 매우 강한 가정이었고, 로마인이 창조한 이것이야말로 아무리 로마를 싫어하는 사람도 좋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법률이었다. 종교는 그것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는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러나 법은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아니,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 사이이기 때문에 법이 필요하다.
로마인이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누구보다도 강하게 법의 필요성에 눈을 뜬것도 그들의 종교가 가진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덧붙여 말하면, 로마인과 마찬가지로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신에게 요구하지 않은 그리스인은 그 역할을 철학에 요구했다.
철학은 그리스에서 태어났다. 특히 소크라테스 이후 그리스 철학의 흐름은 그리스인의 이런 사고 경향이 맺은 열매다. 인간의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종교에 맡긴 유대인.
철학에 맡긴 그리스인.
법률에 맡긴 로마인.
이것만 보아도 이 세 민족의 특성이 떠오를 정도다. 그거야 어쨌든, 누마는 다양하고 근본적인 개혁을 어떻게 성공시킬 수 있었을까.
왕위에 올랐을 때의 누마는 로마 시민도 아니었다. 또한 로물루스 시대에 로마로 이주하여 라틴족과 로마의 기둥이 된 사비니족한테서 전폭적인 지원를 받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누마는 지지세력도 없고 혈연관계도 없는 한 이방인으로서 왕이 된 것이다. 비록 원로원의 요청에 따라 왕위에 올랐고 민회에서 정식으로 승인을 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너무 약했다.
원로원은 누마가 못마땅하면 로물루스처럼 암살할 수도 있었고, 민중의 지지도 변덕스럽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사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별로 많지 않으니까, 말로 설득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로물루스는 민중이 쉬운 군사적 성공이라는 힘을 갖고 있었지만, 누마에게는 이것마저도 없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선왕 로물루스의 호위대였던 300명의 병사를 해임했다. 그리고 왕을 상징하는 보라색 옷이 아니라 신관이 입는 하얀 토가를 걸치고, 혼자서 자주 숲속에 틀어박혔다. 누마가 숲속에서 님프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소문이 돌았다. 얼마 후, 사람들은 누마가 님프를 통해 신들로부터 계시를 받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누마는 숲에서 나올 때마다 새로운 개혁안을 민회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민회는 그 개혁안을 모두 승인했고,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동의를 표했다. 권력이란 거칠고 우락부락한 형태로만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이 누마는 43년 동안 로마를 다스린 뒤, 님프들의 마중을 받으며 평온하게 저세상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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