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루스가 죽은 뒤에 선출된 제4대 왕은 사비니족 출신의 안쿠스 마르티우스라는 자였다. 그는 누마의 외손자로 로마에서 태어나 자랐다. 외할아버지 누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다섯 살이었다니까, 왕위에 올랐을 때는 서른일곱 살이었다. 그 역시 누마와 마찬가지로 평화적인 왕이 될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을지 모르나, 시대는 안쿠스에게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선왕의 32년 치세는 라틴족의 모국인 알바롱가 공략과 사비니족과의 전투로 시종했지만, 안쿠스 역시 다른 라틴 부족과의 싸움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로마가 서서히 힘을 축적하여 부족들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병력이 없어도 주목받을 만한 힘을 갖지 않은 자에게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로마에 사는 라틴족과 사비니족은 어디까지나 로마의 라틴족과 사비니족이었다. 로마가 동족에게 밀려난 자들이나 이주 희망자들로 건국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로마 근처에는 라틴족과 본가라고는 하지만, 라틴족이 세운 하나의 도시국가에 불과했다. 그 결과, 이런 이웃 부족들과 로마의 관계는 야누스 신전의 문이 닫혀 있게 내버려둘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제3대 왕 툴루스가 라틴족이었기 때문에 사비니족과의 전투에 전력을 기울인 것은 아니다. 제4대 왕 안쿠스가 사비니족이었기 때문에 라틴족을 상대로 싸운 것도 아니다. 사실 툴루스는 자신과 핏줄이 이어져 있는 알바롱가를 공략했다. 그들은 이제 로마인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굳이 차이를 요구한다면, '라틴계 로마인'이나 '사비니계 로마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로마인'들은 싸움에 진 라틴족이나 사비니족만이 아니라 그밖의 민족도 피정복민으로 예속시키지 않고, 물론 노예로 삼지도 않고 '로마화'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패배자는 로마로 강제 이주당했다. 그들에게는 선주민과 동등한 시민권이 주어지고, 유력자한테는 원로원 의석이 제공되었다. 다만 이 무렵부터 싸움에 진 도시는 파괴되기 시작했다. 애국자 리비우스는 이것이 이주자를 로마에 정착시키기 위한 방책이었다고 애국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도 촌락까지는 파괴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후에도 라틴족과 사비니족은 독립된 부족으로 존속했기 때문이다. 로마는 성급하게 굴지 않았다. 아니, 성급하게 굴고 싶어도 아직은 힘이 모자랐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로마의 일곱 언덕은 주민으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팔라티누스 언덕에는 로물루스 시대부터 라틴계 로마인이 모여 살았고, 사비니계 로마인은 오래 전에 퀴리날리스 언덕에 본거지를 두었다. 알바롱가인에게는 카일리우스 언덕이 주어졌고, 가장 새로운 이주민들한테는 아벤티누스 언덕이 제공되었다.
여기서 신들의 거처가 된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더하면, 일곱 언덕 가운데 다섯 개가 주민을 가진 셈이 된다. 적당한 높이와 넓이를 가진 언덕부터 활용했을 것이다. 비미날리스 언덕과 에스퀼리누스 언덕은 꼭대기의 평지가 좁은데다 높이도 낮아서 배수문제를 먼저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제4대 왕 안쿠스는 25년에 걸친 치세 동안 전투 외에도 몇 가지 사업을 완수했다.
첫째는 테베레 강에 처음으로 다리를 놓은 것이다. 테베레 강 서안에 있는 자니콜로 언덕을 요새화했기 때문에, 그것과 테베레 강 동안에 모여 있는 일곱 언덕을 이을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다리는 방어상의 이유도 있어서 목조로 만들었다.
두 번째 사업은 테베레 강 어귀에 있는 오스티아를 정복한 것이다. 오스티아를 정복함으로써 로마는 비로소 지중해와 마주보게 되었다. 또한 오스티아 주변의 모래밭에서는 소금이 생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염전 사업도 수중에 넣게 되었다. 이것은 로마인에게 화폐 아닌 화폐를 주었다.
소금은 누구한테나 필수불가결한 물품이다.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이점이다. 게다가 경제활동이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졌던 당시의 로마에서는 이점이 훨씬 컸다. 소금을 갖는 것은 곧 화폐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출발하는 도로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도로의 하나는 '비아살라리아'라는 길이다. 이 이름을 직역하면 '소금길'이 된다. 이 길은 테베레 강 어귀에서 산출되는 소금을 내륙지방의 여러 도시로 운반하기 위한 길이었다. 로마는 농경민족한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완만하면서도 착실하게 세력권을 확대해 나갔다.
이렇게 한 걸음씩 천천히 지반을 굳혀가는 방식은 나름대로 칭찬해도 좋은 생활방식이지만, 조직에 이질적인 분자가 섞여 들어온 것이 비약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이따금 일어난다. 마치 화학반응 같은 현상인데, 건국한 지 139년째 되던 해에 로마에도 바로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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