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쿠스가 아직 왕위에 있던 시절, 우마차를 몇 대나 거느린 이방인 일가가 로마로 들어왔다. 화려한 차림새와 길게 기른 머리를 보면, 이들이 에트루리아인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 일가의 가장인 타르퀴니우스는 순수한 에트루스크가 아니라, 그리스 코린트에서 에트루리아로 망명한 그리스인 아버지와 에트루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에트루스크였다.
어머니는 에트루리아에서도 지위가 높은 집안 출신이었지만, 에트루리아 사회는 폐쇄적이어서 경제적인 관계라면 민족을 따지지 않지만, 자기들 사회에 다른 피가 섞여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에트루리아에서는 평생 동안 이방인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위 향상은 절망적이라는 타르퀴니우스는 에트루리아 밖에서 팔자를 시험해 보기로 결심했다.
코린트인의 피를 이어받았으므로, 코린트인이 남부 이탈리아에 건설한 식민지 시라쿠사로 가도 좋았을 것이다. 기원전 7세기 말에는 시라쿠사가 로마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타르퀴니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에트루리아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인도 순수한 혈통을 좋아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혼혈아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곳으로 로마를 선택했다. 로마에서는 정착할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시민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무렵에는 타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또한 누마와 안쿠스가 보여주듯이, 건국 당사자인 라틴족이 아니더라도 왕이 될 수 있었다. 타르퀴니우스에게는 이런 점도 매력이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전재산을 가지고 에트루리아를 떠난 그는 일족과 가신들을 거느리고 로마에 정착했다.
이 외국인은 그 무렵 로마에 있었던 여러 군데의 에트루리아인 공동체에는 의존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보다는 라틴계와 사비니계의 구별도 차츰 없어져가던 로마인 사회에 침투하려고 했다. 부모한테서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은 그는 재능도 있었기 때문에, 이 재력과 재능으로 로마인 사회에 쉽게 침투할 수 있었을 것이다.
10년도 지나기 전에 이 이방인은 안쿠스 왕의 유언 집행자로 지명될 만큼 출세했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는 공증인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왕이 죽은 뒤 스스로 왕에 입후보한 것이다. 그는 또한 선거운동을 한 최초의 로마인이기도 했다. 리비우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타르퀴니우스는 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로마 전역에서 연설를 하고, 자기한테 표를 던져 달라고 시민들을 설득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선거 연설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타국에서 이주한 사람이지만, 타국인이 로마 왕이 된 선례가 있다. 처자와 함께 전재산을 가지고 로마에 왔으니까, 이 로마에 뼈를 묻을 마음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나이도 책임있는 공직에 앉기에 적당하고, 선왕의 신뢰도 두터웠고, 로마의 신들을 공경하고 로마 법을 존중하는 점에서도 남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민회는 이 타르퀴니우스를 압도적 다수로 왕에 선출했다. 원로원도 두말없이 승인했다. 라틴계, 사비니계로 이어져 내려온 로마 왕의 계보에 처음으로 에트루리아계 왕이 등장한 것이다.
제5대 왕이 된 타르퀴니우스는 참으로 유능한 지도자임을 보여주었다. 37년에 이르는 그의 치세 동안, 로마의 세력권은 더욱 확장되었을 뿐 아니라 로마의 내부도 비로소 도시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도시로 변모했다. 시민들의 생활 수준도 비약적인 향상을 이룩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로물루스 이래 줄곧 100명이었던 원로원 의원수를 200명으로 늘렸다. 인구가 늘어난 것이 이유였지만, 그의 참뜻은 자신의 권력 확립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원로원 의원만은 왕이 지명할 수 있다. 타르퀴니우스가 자신의 입김이 닿는 사람을 원로원 의원으로 지명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신참자인 타르퀴니우스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기성세력의 아성인 원로원이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민중의 지지로 왕이 되었지만, 민중의 지지에만 의존할 경우의 위험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왕은 주변 부족들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떠났다.
왕들의 적절한 지휘와 병사들의 용맹으로 당시의 로마군은 서서히 명성을 높이고 있었지만, 상대가 비록 강적은 아니더라도 로마 역시 사람으로 치면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 로마군은 아직 치열한 격전 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번 전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싸움에 진 사람들을 로마로 이주시키고 시민권을 주어 동화시키는 정책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패배자한테서 빼앗은 전리품을 수레에 가득 싣고 로마로 개선했다. 로마 시민들은 그 수많은 전리품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후에도 로마가 이민족의 로마 이주를 여전히 환영한 것을 보면, 타르퀴니우스의 노선 변경은 개인적 인기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그렇기는 하지만, 주변을 위협하고 있던 이웃 부족들은 당분간이나마 얌전해졌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기간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로마 개발에 착수했다.
그는 로마인이 일곱 언덕에만 살고 있으면 로마를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언덕과 언덕 사이에 펼쳐져 있는 넓은 습지대로 눈을 돌렸다. 팔라티누스 언덕 북쪽에 있는 저지대는 그때까지 도랑이 그물처럼 뻗어 있는 습지대였다.
거기에 지하수로를 내면 저지대 전체의 물을 모을 수 있다. 지하수로를 테베레 강까지 연결하면 모인 물의 배수 문제는 해결된다. 이리하여 대규모 지하수로 공사가 착수되었다. 오늘날에도 테베레 강가에서는 거대한 배수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간척사업으로 평지가 된 일대는 처음에는 시장으로 쓰였다.
하지만 각 부족끼리 모여 사는 일곱 언덕에 비하면, 이 일대는 중립지대가 된다. 그리고 지하수로의 위쪽을 덮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이곳만 돌로 포장하였다. 그래서 공공 건축물이 서서히 이 일대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의 심장부라고까지 부르게 된 '포룸 로마눔', 즉 '포로 로마노'가 탄생한 것이다.
팔라티누스 언덕과 아벤티누스 언덕 사이에 펼쳐져 있던 습지대도 같은 방법으로 저지대로 탈바꿈했다. 여기도 공공 목적으로 사용되어 대경기장이 건설되었다.
주변의 간척사업으로 왕래가 편해진 일곱 언덕 가운데 가장 높은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에는 로마의 최고신 우피테르의 신전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신들도 역시 그들에게 어울리는 집을 갖게 된 것이다.
에트루리아인이나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이 도시로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한 로마도 오스티아를 정복하여 테베레 강 어귀에 항구를 갖게 되고 지하수로를 이용한 간척사업을 벌인 결과, 그때까지 이탈리아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유형의 도시로 변모하고 있었다.
높이가 너무 낮고 수도 너무 많다고 여겨진 일곱 언덕도 복수 민족의 집합체인 로마에서는 각 민족의 특색을 유지하면서도 전체를 통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점으로 바뀌었다. 타르퀴니우스의 간척사업은 활용할 수 있는 토지를 늘렸을 뿐만 아니라, 민족 공동체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짐으로써 로마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에도 이바지했다.
또한 일곱 언덕과 그 주변을 흐르는 테베레 강으로 이루어진 로마는 단조로운 평야보다 변화가 풍부한 아름다운 경치를 갖는다. 그 아름다움이 이 시대부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개발사업을 실제로 수행한 사람은 로마 군단의 병사들이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왕이 병사들을 이용한 것은 "평시에도 병사들을 전시와 똑같이 활동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후에도 로마에서는 이런 종류의 건설작업을 군단 병사들에게 맡긴 예가 많은데, 이 전통도 간척사업에 그 발단을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발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토지도 있고, 실제 작업에 종사할 사람이 있어도, 거기에 필요한 기술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로마인은 아직 이만한 대역사를 추진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지 않았다. 타르퀴니우스는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에트루리아에 간척 기술, 지하수로 공사에 필요한 기술, 도로포장 기술, 신전 같은 대규모 석조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기술 등 모든 기술이 에트루리아에서 들어왔다.
기술 지도자로 에트루리아인도 들어온다. 로마에는 머리를 길게 기른 에트루리아인이 갑자기 부쩍 늘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루어진 에트루리아 기술의 도입은 단순한 도임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로마인은 에트루리아 기술자들의 지도를 받고 일하면서, 그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이것이 나중에 세계적인 토목 기술자들을 키워내는 기초가 되었다. 타르퀴니우스가 도입한 에트루리아 기술로 변모한 로마 시가지를 보고, 원래 농경민족인 로마인은 기술력에 눈을 뜨게 되었다. 로마에 대한 에트루리아 문명의 영향은 기술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대규모 토목사업에는 자재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분야를 담당하는 것도 당시의 로마인에게는 무리였던 만큼, 이것을 맡을 사람도 역시 에트루리아인밖에 없었다. 이전의 로마에는 가내공업 규모의 산업밖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상업과 수공업이 시내 전역에서 눈에 띄게 되었다. 당연히 경제가 활발해졌다.
상공업의 활성화로 사람들의 생활수준도 향상되었다. 로마는 여러 측면에서 도시국가로서 균형잡힌 구조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타르퀴니우스 왕은 우연히 한 에트루리아인 소년을 만났다. 이 소년의 출신은 확실하지 않았다. 노예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지만 왕은 왠지 이 소년이 마음에 들어 친아들과 함께 기르기로 했다. 소년이 젊은이가 되었을 무렵에는 그의 총명함과 용기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로마 귀족의 자제 가운데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세르비우스를 사위로 삼았다. 타르퀴니우스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던 선왕 안쿠스의 두 아들은 타르퀴니우스가 이처럼 세르비우스를 후대하자 불안해졌다. 현재의 왕이 사위를 후계자로 결정하면, 그들의 희망은 사라지고 만다.
타르퀴니우스는 치세가 37년에 이르렀을 무렵에도 여전히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원로원의 평판도 좋았기 때문이다. 그 타르퀴니우스의 추천은 곧 당선을 의미했다. 안쿠스의 두 아들은 선수를 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왕을 암살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쪽도 왕위에 오르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세르비우스를 소년 시절부터 키워온 타르퀴니우스의 아내가 남편에게 일어난 변고를 알자마자 세르비니우스를 불러서, 재빨리 왕위를 차지하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왕비한테는 친아들이 둘이나 있었지만, 왕이 암살당한 직후에 왕비가 부른 것은 사위였다.
이런 사정이 있어서, 제6대 왕이 세르비우스는 민회에서의 선거를 거치지 않고 원로원의 결의만으로 왕위에 올랐다. 로마는 세르비우스를 왕으로 가짐으로써 또 한 번의 도약을 기약하게 되었다. 선왕 타르퀴니우스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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