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마의 뒤를 이어 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톨루스 호스틸리우스다. 로물루스와 마찬가지로 라틴계 로마인이었던 그는 로물루스처럼 공격형이었다. 그가 이끌게 된 로마도 내부를 충실히 다진 누마 시대를 거쳐 이제는 외부로 발전할 시기에 이르러 있었다.
툴루스 왕은 라틴족의 발상지로서 로마인에게는 선조의 땅이기도 한 알바롱가를 첫 번째 공격 목표로 삼았다. 전쟁의 명분을 찾아내는 것은 간단했다. 양국의 접경 지역에 사는 농민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그 결과 발생한 약탈행위의 변상을 알바롱가가 거부한 것이 전쟁의 명분이 되었다.
80년의 역사밖에 갖지 않은 로마에 비해, 알바롱가는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독립국이다. 간단히 일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툴루스 왕은 강대한 에트루리아가 바로 옆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쓸데없는 출혈은 양국에 모두 이롭지 않다는 이유로, 대표자끼리 결투를 벌여서 승부를 결정짓자고 제안했다.
양군에는 각각 3명의 형제가 있었다.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아들과 클리아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 이들이 각자의 조국을 대표하여 싸우게 되었다. 결투에 이긴 나라가 진 나라를 평화적으로 다스린다는 협정도 이루어졌다. 6명의 젊은이들은 전투대형을 해체하고 대기중인 양군 진영 앞으로 나섰다.
신호가 떨어지자, 양군 병사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지켜보는 가운데 칼을 든 여섯 전사의 결투가 시작되었다. 한바탕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뒤, 마침내 로마 쪽 전사 가운데 하나가 쓰러졌다. 또 한 사람이 알바롱가 전사의 칼에 쓰러졌다. 혼자 남은 로마 전사의 가슴은 공포로 오그라들었다. 그는 쏜살같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아나면서 뒤를 돌아본 그는 쫓아오는 알바롱가 전사들 사이의 거리가 서로 많이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맨 먼저 쫓아온 알바롱가 전사를 우선 쓰러뜨렸다. 그리고 두 번째 적도 쓰러뜨리는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한 사람뿐. 이긴 것은 결국 로마 전사인 호라티우스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알바롱가의 왕은 나라의 운명이 단 한 번의 결투로 결정되어 버린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까운 부족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맞서게 했다. 로마는 알바롱가의 왕에게 약속 이행을 강요하기보다 먼저 이웃 부족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동안 알바롱가는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전황을 주시하는 어리석은 오류를 저질렀다. 싸움은 로마 쪽이 우세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싸우던 툴루스 왕은 진짜 목표는 눈앞에 있는 부족들이 아니라 알바롱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여러 부족을 상대로 일단 승리를 거두어 그들을 꼼짝못하게 하는데 성공한 로마군은 물밀듯이 알바롱가로 쳐들어갔다. 알바롱가는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함락되었고, 왕은 포로가 되었다. 톨루스는 로마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책임을 알바롱가 왕에게 모두 뒤집어 씌었다.
그는 두 필의 말에 알바롱가 왕의 다리를 하나씩 묶은 다음, 말에게 채찍질을 가하여 제각기 반대방향으로 달리게 했다. 로
마인이 집행한 최초의 능지처참이었다.
알바롱가 시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주민들은 로마로 강제 이주당했다. 하지만 노예로서가 아니라 로마 시민으로서였다. 로마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받은 이들의 주거지로 키일리우스(첼리오) 언덕이 할당되었다. 퀸틸리우스,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같은 알바롱가의 유력한 가문은 로마 귀족이 되었고, 그 대표자한테는 원로원 의석이 제공되었다.
만약 이때 알바롱가 백성이 몰살당했거나 노예가 되었다면, 나중에 율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바롱가 공략은 단순한 이웃 부족의 공략과는 의미가 달랐다. 이것은 앞으로는 로마가 라틴족의 조국이라는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이제 자기 부족에서 밀려난 자들이 모여 세운 분가가 아니라, 라틴족의 본가가 되었다. 로마인은 전쟁에 패한 민족을 로마에 동화시키는 로물루스 시대 이래의 노선을 계승하면서도,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배신행위를 저지른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노선도 확립했다.
사비니족의 동화로 이미 크게 늘어나 있던 로마 인구는 알바롱가인의 동화로 더욱 늘어났다. 동등한 권리를 준다는 것은 곧 동등한 의무도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시 시민의 첫 번째 의무는 병역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전력도 더 한층 증강되었다.
이 군사력을 이끌고 싸움을 거듭하여, 로물루스보다 더 찬란한 군사적 영광에 빛나던 툴루스의 치세도 32년으로 끝났다.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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