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있는 일곱 언덕은 모두 테베레 강 동쪽 연안에 모여 있다. 테베레 강은 로마를 지나 30킬로미터쯤 흘러서, 오스티아를 지나 지중해로 흘러든다. 아펜니노 산맥에서 비롯하여 3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흘러온 이 강은 대하라고 부를 수 있는 강은 아니지만, 그래도 로마 근처에 이를 무렵에는 수량이 크게 늘어난다.
수량이 풍부한 테베레 강은 로마 근처에 이르면 크게 서쪽으로 우회한 다음 동쪽으로 우회했다가 다시 서쪽으로 우회하면서 로마에서 멀어진다. 이렇게 우회하던 물줄기도 홍수가 일어나면 당장 굵은 직선의 흐름으로 바뀌어, 곧장 지중해로 흘러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곱 언덕은 강 근처에 있으면서도 홍수 피해를 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강이 동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지점 언저리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홍수가 나면 물에 잠기는 저지대에도 사람이 살 만큼 인구가 늘어났을 무렵에는 로마의 국가체제도 확고해져 대규모 치수사업을 벌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홍수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어졌다.
일곱 언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퀴리날리스(이탈리어로는 퀴리날레), 비미날리스(비미날레), 에스퀼리누스(에스퀼리노), 카피톨리누스(카피톨리노), 팔라티누스(팔라티노), 카일리우스(첼리오), 아벤티누스(아벤티노)로 내려온다. 언덕과 언덕 사이의 평지는 아직 습지였다.
일곱 언덕은 모두 낮아서, 가장 높은 카피톨리노 언덕조차도 해발 50미터밖에 안된다. 에트루리아인이 도시를 세운 언덕은 모두 해발 300미터 내지 500미터 정도였다. 덧붙여 말하면, 현대 이탈리아의 대통령 관저는 퀴리날레 언덕에 있다. 선거 업무를 담당하는 내무부는 비미날레 언덕 위에 있다.
그래서 텔레비전에서도 대통령 관저에서 중계한다고 말하는 대신 퀴리날레에서 중계한다고 말하고, 선거 속보를 알릴 때에도 내무부라고 말하지 않고 비미날레에서 중계한다고 말한다.
다시 2천 8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도시 건설의 조건 가운데 방어를 가장 중시한다면, 일곱 언덕 중에서는 카피톨리노 언덕이 가장 적합했을 것이다. 어느 언덕보다도 테베레 강과 가까울 뿐 아니라, 삼면이 깎아지른 벼랑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대기의 평지가 너무 좁았다.
오늘날에도 로마 시청과 미술관 두 개와 교회가 들어서 있을 뿐인데도 더 이상 여유가 없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별로 높지는 않지만 언덕 위의 면적이 10헥타르나 되고 테베레 강과도 가까운 팔라티누스 언덕을 선택했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신들의 거처로 예정되었다.
역시 테베레 강과 가깝고 사람이 거주할 면적도 충분한 아벤티누스 언덕은 일곱 언덕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기 때문에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로물루스와 싸우다 죽은 레무스가 택한 것이 바로 이 아벤티누스 언덕이었다. 레무스가 죽고 유일한 왕이 된 로물루스는 우선 팔라티누스 언덕 주위에 성벽을 쌓았다.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의사 표시다. 신들에게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도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날은 기원전 753년 4월 21일이었다고 한다. 이 로마 건국기념일은 그후 2천 년이 넘은 오랜 세월 동안 끊이지 않고 해마다 축하되는 명절이 되었다, 그 해에 로물루스의 나이는 열여덟, 이 약관의 젊은이와 그를 따라온 3천 명의 라틴족에 의해 로마는 건국되었다.
로마를 건국하고 초대 임금이 된 로물루스는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하는 왕이 되지는 않았다. 국정을 3개의 기관에 나누어준 것이다. 왕과 원로원 및 민회. 이 3개의 기둥이 로마를 떠받치게 되었다. 종교제의와 군사 및 정치의 최고 책임자인 왕은 민회에서 투표로 선출하기로 결정되었다.
양치기와 농민의 우두머리였던 로물루스 자신이 제멋대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서 뽑혀서 왕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민회에서 왕을 선출한다는 왕정답지 않은 이 제도도 당시 로마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로물루스는 100명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각 가문의 어른을 모으면 그 정도 숫자가 되었던 게 아닐까. 원로원 의원은 정부의 관직이 아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따라서 민회의 선거를 거칠 필요가 없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원로원이라는 공적 기관에 속해 있었다.
유력자들의 조언을 수렴하는 것이 목적인 기관이지만, 정치체제 확립을 중시한다면 공적인 지위를 주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사적 기관은 역할도 책임도 명확하지 않고, 따라서 조언을 받는 쪽-이 경우에는 왕 개인-의 기분에 좌우되기 쉽게 때문이다.
원로원 의원들은 아버지를 의미하는 '파테르'라고 불렸다. 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 낱말에서 귀족을 뜻하는 '피트리키'라는 낱말이 생겨났다. 민회는 로마 시민 전원으로 구성되었다. 왕을 비롯한 정부관리를 선출하는 것이 민회의 역할이다.
다만, 민회는 정책을 입안할 권리는 갖지 못했고, 왕이 원로원의 조언을 받아 입안한 정책을 승인할 것인가 부인할 것인가를 결정했을 뿐이다. 전쟁을 할 때도 그들의 승인이 필요했고, 외국과 강화를 맺을 때도 그들이 승인해야만 비로소 효력이 발휘되었다.
로마라는 국가의 기본 형태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당시의 로마 실정에 적합하고 장래에도 적응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고 무리가 적은 정치체제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로물루스와 함께 로마 건국에 참여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왕이 되기 전의 로물루스가 이끌었던 양치기와 농민들이 라틴이라는 이름의 민족이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라틴족은 라틴어를 사용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라틴어를 사용하는 민족 가운데 한 부족이 가족과 함께 테베레 강가로 이주해 와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것은 아니다. 로마가 탄생한 직후, 로마 시민의 대부분은 독신 남자였던 것 같다. 정치체제를 확립한 뒤, 로물루스가 수행한 두 번째 사업은 바로 이민족 여인들을 강탈하는 일이었다.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폭력까지 동원하여 다른 민족으로부터 여자를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남자들의 집단이었다면, 그들의 정체에도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은 각자의 부족에서 밀려난 자들이 아니었을까. 부족단위의 이주라면, 처자를 동반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위대한 로마의 건국담으로는 아무래도 너무 허술하고, 무엇보다도 자손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며 트로이의 영웅인 아이네이아스의 편력담이 고안되고, 그것과 로물루스가 결부된 게 아닐까.
신화와 전설의 가치는 그것의 사실 여부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믿어왔는가에 있다. 로마인은 줄곧 자기네가 트로이 영웅의 후예라고 믿었고, 그리스인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자행한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은 푸생이나 루벤스 같은 후세 화가들한테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게 되는데, 고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줄거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로물루스는 인근에 사는 사비니족을 축제에 초대했다. 신에게 바쳐진 축제일에는 전투가 금지된다. 사비니족도 기꺼이 초대를 받아들여 온 가족이 로마까지 찾아왔다. 축제 기분이 고조되었을 무렵, 로물루스의 명령에 따라 로마의 젊은이들은 사비니족 아가씨들에게 덤벼들었다.
느닷없이 허를 찔린 사비니족 남정네들은 아내와 자식과 노인들을 보호하면서 자기네 부락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비니족도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들은 로마인에게 강탈당한 여인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로물루스는 정식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삼겠다고 대답했다.
대답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솔선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로물루스 자신도 총각이었을 것이다. 사비니족은 그래도 만족하지 않고, 로마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로마인과 사비니족은 통틀어 네 번 전투를 벌였다. 그 대부분은 로마의 우세 속에 진행되었지만, 한 번은 팔라티누스 언덕과 카피톨리누스 언덕 사이에서 전투를 치렀다니까 사비니족이 로마로 쳐들어온 적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네 번째 전투가 한창일 때, 강탈당한 사비니족 여인들이 싸움판에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저마다 남편과 오라비가 서로 죽고 죽이는 곳을 차마 볼 수 없다고 호소했다. 여인들은 비록 강탈당한 몸이긴 하지만 노예가 된 것은 아니고, 아내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인 남편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로물루스 왕도 사비니족의 타티우스 왕도 그녀들의 호소를 받아들이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이리하여 두 부족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졌다.
서양에는 지금도 신랑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풍습이 있다. 이 사건 이후 시작된 로마인의 풍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로물루스가 후세의 로마인에게 남긴 관례는 남편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것만은 아니었다. 로물루스는 사비니족에게 서로 세력권을 존중하여 공존하는 형태의 화평이 아니라 두 부족이 하나로 합치는 형태의 화평을 제안했다.
부족 전체가 로마로 이주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퀴리날리스 언덕을 사비니족의 주거지로 제공했다. 사비니족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로마인이 네 번의 전투를 모두 이겼기 때문에, 사비니족으로서도 강자인 로마와 합칠 경우의 이익을 계산했을 것이다.
게다가 로마에 합병당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대등한 입장에서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사비니족의 왕 타티우스는 로물루스와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결국 로마는 두 명의 왕을 모시게 된 셈이다. 또한 사비니족의 자유민에게는 로마인과 똑같은 완전한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사유재산에 관한 모든 권리와 함께 민회에서의 투표권도 갖게 된 것이다. 사비니족 장로들에게는 원로원 의석도 제공되었다. 로물루스로서는 인구 증가와 병력 증강을 위한 방책이었겠지만, 이 방식은 당시 로마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성과를 올리게 된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패자조차도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 건국자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로물루스가 이룩한 또 하나의 업적은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이었다. 사비니족의 왕 타티우스는 곧 전사했기 때문에, 전투는 거의 대부분 로물루스가 지휘했다.
37년에 걸친 로물루스의 치세는 대부분 신생국가의 숙명이기도 한 인근 부족과의 싸움으로 점철되었다. 100명의 병사로 편성된 백인대 제도를 고안해낸 것도 바로 로물루스였다. 이것은 로마 군단의 최소단위이자 핵으로써, 로마가 존재하는 한 백인대 제도도 계속 존속하게 된다. 거듭된 전투로 전사자도 적지 않았을 터인데, 로마의 인구와 전력은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증가했다. 사비니족과 합친 것은 단기적으로 보아도 성공이었던 셈이다.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지 39년째를 맞이한 기원전 715년, 로물루스는 여느 때처럼 군대를 열병하고 있었다. 그때 온 하늘이 별안간 흐려지면서 세찬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대 같은 빗줄기가 시야를 가리고,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우레 소리가 주위를 압도했다.
겨우 비가 그치고 우레 소리도 사라진 뒤,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텅 빈 옥좌였다. 로물루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왕이 신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로물루스의 업적을 인정하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었기 때문에, 로마인은 갑작스러운 불행에 당황해하면서도 로물루스를 로마의 국부로 삼고 신으로 모실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후계자를 결정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백성들 사이에는 왕권이 강해지는 것을 싫어한 원로원 의원들이 왕을 죽였다는 소문도 퍼지고 있었다.
또한 라틴족은 자기네 가운데에서 왕이 선출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사비니족은 그들대로 이번에는 자기네 쪽에서 왕을 배출하고 싶어했다. 원로원 일파가 로물루스를 죽였다는 소문이 어쩌면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원로원은 로물루스 지지파와 그 반대파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흔히 제삼자가 추대된다. 백성들의 이목은 인격자로 알려진 한 인물에게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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