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728x90
톨루스가 죽은 뒤에 선출된 제4대 왕은 사비니족 출신의 안쿠스 마르티우스라는 자였다. 그는 누마의 외손자로 로마에서 태어나 자랐다. 외할아버지 누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다섯 살이었다니까, 왕위에 올랐을 때는 서른일곱 살이었다. 그 역시 누마와 마찬가지로 평화적인 왕이 될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을지 모르나, 시대는 안쿠스에게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선왕의 32년 치세는 라틴족의 모국인 알바롱가 공략과 사비니족과의 전투로 시종했지만, 안쿠스 역시 다른 라틴 부족과의 싸움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로마가 서서히 힘을 축적하여 부족들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병력이 없어도 주목받을 만한 힘을 갖지 않은 자에게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로마에 사는 라틴족과 사비니족은 어디까지..
누마의 뒤를 이어 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톨루스 호스틸리우스다. 로물루스와 마찬가지로 라틴계 로마인이었던 그는 로물루스처럼 공격형이었다. 그가 이끌게 된 로마도 내부를 충실히 다진 누마 시대를 거쳐 이제는 외부로 발전할 시기에 이르러 있었다. 툴루스 왕은 라틴족의 발상지로서 로마인에게는 선조의 땅이기도 한 알바롱가를 첫 번째 공격 목표로 삼았다. 전쟁의 명분을 찾아내는 것은 간단했다. 양국의 접경 지역에 사는 농민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그 결과 발생한 약탈행위의 변상을 알바롱가가 거부한 것이 전쟁의 명분이 되었다. 80년의 역사밖에 갖지 않은 로마에 비해, 알바롱가는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독립국이다. 간단히 일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툴루스 왕은 강대한 에트루리아가 바로 옆에 존재하는 상..
알맞은 시기에 인재가 알맞은 자리에 등용되어 능력을 발휘하는 예는 융성기에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로마 역사도 상당히 오랫동안 이런 예를 보여주지만, 누마의 즉위도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마는 로물루스의 초빙을 받고 로마로 이주한 동포들과는 달리,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 남은 사비니족이었다. 농사를 짓는 한편, 지식 탐구에도 힘쓰는 주경야독의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높은 덕망과 깊은 교양은 로마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라틴파와 사비니파의 대립으로 경직 상태에 빠진 로마 원로원은 누마를 만장일치로 왕으로 추대했다. 사비니족의 땅까지 누마를 찾아간 장로들은 이 사실을 그에게 전하고, 왕위에 앉아 달라고 부탁했다. 누마는 처음 얼마 동안은 거절했다. 그는 이미 나이 마흔 살이 되..
에트루리아인의 문자는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에트루리아인을 수수께끼의 민족이라고 불렀다. 에트루리아라는 나라의 백성이라는 의미에서 이들을 에트루스크라고 부르지만, 이것도 고유한 하나의 민족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대에도 오늘날의 토스카나 움브리아 및 라치오 북부를 합한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을 통틀어 에트루스크, 즉 에트루리아인이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미국에 사는 사람을 모두 미국인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에트루리아인이 어디서 왔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소아시아에서 바다를 건너왔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고, 내륙지방에서 남하해 왔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어쨌든 그들은 기원전 9세기에는 이미 철기 제조법을 알고 있었다. 중부 이탈리아에는 광산이 많이 분..